2007년 12월 03일
일본 경제 발전사
일본 경제 혹은 경영 발전의 역사를 논하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에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뿌리깊은 역사이다. 우리 나라 역시 국사 등의 과목에서 조선 시대 후기에서 말기에 거쳐 기초적인 자본주의 개념이 도입되고 분업이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 근본적인 정치 체제의 차이점으로 인해 그 정도는 현저하게 달랐다.
우선 조선의 경우 뿌리 깊은 유교 사상에 기반한 중앙 집권 체제가 확립되어 있었던 탓에 지방 관리들에게 어느 정도의 재량은 있었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국책 사항은 중앙 정부의 감시와 관리 하에서 진행되었다. 경제 또한 마찬가지로, 가장 대표적인 예로 국내 통화의 단일화를 들 수 있다. 현대 사회의, 아니 수백년간 국내에서는 단일되고 안정된 정치 체제를 유지해 온 역사를 지닌 한국인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일 수도 있지만, 실지로 국내 통화가 단일 화폐로 통일되어 있는 국가는 역사상 그리 많지 않았다.
대영 제국의 경우를 실례로 들어도 기축 통화는 영국 파운드화였다고 하나 산하 식민지에서는 여전히 현지 화폐가 통용되었고, 심지어 프랑스의 프랑조차도 어느 정도 국내에서 운용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는 일본, 즉 전국 시대 이후 도쿠가와 막부의 권위 아래 통일되었다고 하는 에도 시대 일본도 마찬가지로, 전국 시대의 다이묘에 비해 그 권위와 권력이 대폭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중세 유럽의 봉건 영주들 못지 않은 권한을 지니고 있었던 각 번의 다이묘들은 번 내의 백성들이 타 번으로 유출되지 않도록 각기 다른 통화 제도를 사용했다.
그 덕분에 여행자들이나 순례자들, 혹은 상인들은 각 번을 넘나들때마다 화폐를 교환할 필요성이 있었으며,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환전상이다. 그리고 그 환전상들이 바로 미쓰이, 스미토모 등 전전의 일본 경제를 지탱해 온 이른바 재벌 일족의 루트인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환전업으로 시작한 이들은 점차 고리대금업으로 영역을 넓혀, 마침내는 금융업으로 까지 분야를 넓혀나갔다. 실지로 막말 각 번의 다이묘들에게 있어서 이들 일족의 금전적 지원 없이는 번의 살림을 꾸려나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미야모토 마타오 외 4 저, 정신성 역 (2001). 일본경영사, 한울아카데미아) 막말의 유신 지사들과 정부군의 싸움에 있어서도 이들은 양 쪽에 균형있는 투자를 지속했고, 그 결과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정부의 경제 발전 과정에서 공기업 불하를 비롯한 갖은 특혜를 누리면서 현대까지 이름을 남긴 거대 재벌로 성장하게 된다.
뿐만아니라 메이지, 타이쇼 시대의 일본은, 동시대의 한국과는 대조적으로 서양의 문호를 적극 받아들여 철도를 비롯한 각종 국가 기반 시설, 즉 인프라스트럭쳐를 대대적으로 정비하기 시작한다. 이 배경에는 물론 일본 역사상 최후의 내전인 무진 전쟁 이후 중앙 정부의 시책에 반발하는 불평 호족 세력들과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진 것에 불만을 품은 사무라이 세력을 일소한 덕에 일본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한 점을 빼 놓을 수 없다.
이후 일본은 서양의 군국주의에 뒤지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식민지 확장에 나서 한국을 필두로 하는 아시아 전역에 광범위한 식민지를 확보, 그를 바탕으로 자국의 경제 발전을 가속화 시키게 된다. 특히 이 식민지 정책은 훗날 일본 경제에 있어서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데, 우선 각 식민지에서 벌어들인 경제력을 바탕으로 발전, 축적해 온 이른바 '모노즈쿠리'의 기술이 전후 일본 경제의 복구 및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는데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으며, 또 한가지는 이들 식민지에 대한 전후 배상금을 정치적으로 교묘히 이용하는 것으로 아세안 지역의 국가들과 오히려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 70년대 일본이 대동아공영권 이론을 주장하며 IBRD (International Bank for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 통칭 World Bank) 의 아시아 판인 아시아 경제 발전 기금의 설립을 주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일본이 지닌 경제적 능력 이외에도 이러한 정치적 수완이 뒷받침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시점에서는 미국의 반대로 인해 무산되었지만, 결국에는 훗날 ADB (Asian Development Bank) 의 설립으로 인해 실현되게 된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러한 와중에 발발한 세계 제 1차 대전으로 인해 발생한 특수로 인해 대전경기라고 불릴 정도의 호황을 누리던 일본이었지만, 전후 유럽의 경제가 복구하면서 또다시 유럽제 제품이 아시아 시장으로 몰려들게 되자 이번엔 오히려 만성적인 불황에 빠지게 된다. 이른바 전후 불황이라고 불리는 장기 불황인데, 여기에 관동대지진으로 인한 지진 공황, 재무 대신의 실언으로 인한 뱅크런 (Bank Run) 으로 인해 발생한 쇼와금융공황 등이 겹치면서 결국 일본 정부는 해결책으로 금 해금을 공표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그 당시 전 세계를 뒤흔들었던 대공황과 맞물리면서, 게다가 금의 수출입이 금지되었던 이전의 가치로 해금을 하는 등 여러 가지 정책적 실수로 인해 촉발된 엔고 현상으로 일본의 수출은 격감, 그로인해 국내 경제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어 일부 지역에서는 아동 매매등의 사건 까지 벌어지면서 심각한 사회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이를 계기로 정부에 대한 군부의 불신감이 커져 그를 억누를 필요성이 대두된 데 더불어 국내 경기 회복을 위한 인플레이션 정책의 일환으로 군비 확장 정책을 펼치게 되면서 일본 또한 군국주의의 길을 걷게 된다. (나라이 오사무 (2005), 더 알고 싶은 일본경제 (일본어판) / Exploring the Japanese Economy, 레이타쿠 대학 출판사, 카나모리 히사오 외 2 (2007), 일본 경제 독본 제 17판, 동양경제, 미야모토 마타오 외 4 저, 정신성 역 (2001). 일본경영사, 한울아카데미아)
이후 제 2차 세계 대전에 참가, 미국의 진주만 공습으로 인한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이어진 전시 체제 하에서 일본은 전시 경제 정책, 우리 나라에서는 소위 병참 기지화 전략으로 알려진 정책을 펼쳐 거국일치 태세로 미국과 연합군의 공격에 맞서게 되나, 전 세계의 식민지를 빼앗긴데다 외국으로의 수출이 차단된 상태에서 국내 경제 상황을 무시한 채 군비 증강에만 전력을 투구한 이 정책으로 인해 일본 경제는 크게 퇴보하게 된다. 그리고 히로시마, 나가사키 두 도시에 대한 공습을 끝으로 일본은 전면적 항복, 이후 GHQ의 통치 하에 현재까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평화 헌법 아래 입헌군주제 민주주의 국가로 개편하는 길을 걷게 된다.
전후 일본 경제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것을 들라면, 우선 철저한 고전파 경제학 이론에 근거한 소위 "이상적인 경제 체제" 건설을 위한 실험 대상이 되었다는 점과 더불어 전시 체제 하에서 다양한 군수 물자 개발에 관여했던 기술자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실제 GHQ 체제 하에서 일본은 미국에서조차 이런 저런 사정으로 인해 정책화 되지 못했던 다양한 이론들이 실제 정책화 되어 도입되 닷지 라인 역시 이러한 실례로 들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큰, 그리고 더욱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 바로 전시 체제의 기술자들로, 신칸센, 자동차, 도로, 철도, 해저 케이블 등, 각종 국가 기반 시설의 확립에 필요한 분야 전 범위에 걸쳐 이들 숙련 기술자들의 축적된 노하우가 진가를 발휘했다.
또 한가지는 전후의 피폐한 경제 상황을 들 수 있는데, 이른바 일본 경제 발전의 삼신기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일본식 경영 시스템의 핵, 즉 종신고용제도, 연공서열제도, 기업 내 노동조합 제도가 생겨난 배경이 바로 절대적 빈곤이기 때문이다. 장기간에 걸친 전시 경제 체제와 패전으로 인한 막대한 피해로 인해 피폐해진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절실한 과제는 우선 먹고 사는 것이었고, 거기에 더불어 GHQ의 재벌 축출 정책으로 인해 일거 대부분의 경영진이 재계에서 퇴출당하게 되면서 노동자급, 혹은 부장, 과장급이던 인사들이 일시에 경영진으로 진출하게 되는 등의 제반 조건으로 인해 경영진과 노동자 층의 의사 소통은 당시 어느 국가보다 밀접한 상태였다. 그로 인해 각 기업들은, 우선 기업의 이익 보다는 자신들이 끌어안고 있는 노동자들과 그 가족의 생존에 중점을 두게 되었고, 그로 인해 생겨난 것이 바로 종신고용제도와 그를 뒷받침하기 위한 연공서열제도, 그리고 그 둘을 가능하게 만든 임금 체제이다.
한국도 그렇지만 일본의 임금 제도는 미국과 영국의 이른바 앵글로 색슨식 임금 체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탄력적이다. 즉 고정 임금의 비율이 낮은 대신 기본적으로 몇 개월 분의 봉급과 맞먹는 보너스가 매년 두차례 내지 세차례지급되며, 무엇보다도 각종 수당이 차지하는 비율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높다. 심지에 전후에는 가족 수당 이외에도 육류 수당 등을 비롯하여 가계의 생계를 뒷받침 할 수 있는 각종 수당들이 지급되었을 정도이다. 이렇듯 영미와는 달리 일본에 있어서 기업이란 노동자의 생계 그 자체를 책임져주는 후원자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그로 인해 자연스레 노동자들의 기업에 대한 충성심 역시 강해졌다.
그와 더불어 탄력적인 봉급 체제 덕분에 영미에서는 기본적으로 불가능한 코스트 삭감 정책, 예를 들면 전 사원의 보너스 삭감을 통한 급료 감축이라던가, 더 나아가 전 사원들의 일시적인 급료 삭감 등의 정책을 실시 할 수 있었다.
또한 노동 조합 역시 영미식의 기업 외 조합이 아닌 기업 내 조합으로 발전하게 된 것 역시 근본적으로 이 절대적 빈곤에 의한 것이다. 본디 노동 조합이란 사용자와의 대결이 주 목적이 아닌, 노동자들 간의 상호 구제가 주 목적이었다. 일본의 노동 조합 역시 설립 당초에는 바로 이 목적에 충실하여, 기업 내부의 각 노동자들이 서로를 돕기 위한 목적으로 자발적으로 결성되었다. 그러한 탓에 같은 산업에 속한 노동 조합이라 할지라도 타 기업의 조합들과는 연대감이 낮고, 또 영미의 노동 조합에 비해 기업에 대한 협조성과 충성심이 높은 편이었다.
종합적으로 전후의 절대적 빈곤 덕에 확립된 이 체제는 일본의 경영진에게 큰 재량을 가져다 주게 되었고, 여기에 정부 시책인 안정 주주, 즉 이른바 메인 뱅크 시스템과 통산성의 적극적 지원 및 지도로 인해 소위 JAPAN Inc. 라고 불릴 정도의 거국일치적 경제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선 조선의 경우 뿌리 깊은 유교 사상에 기반한 중앙 집권 체제가 확립되어 있었던 탓에 지방 관리들에게 어느 정도의 재량은 있었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국책 사항은 중앙 정부의 감시와 관리 하에서 진행되었다. 경제 또한 마찬가지로, 가장 대표적인 예로 국내 통화의 단일화를 들 수 있다. 현대 사회의, 아니 수백년간 국내에서는 단일되고 안정된 정치 체제를 유지해 온 역사를 지닌 한국인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일 수도 있지만, 실지로 국내 통화가 단일 화폐로 통일되어 있는 국가는 역사상 그리 많지 않았다.
대영 제국의 경우를 실례로 들어도 기축 통화는 영국 파운드화였다고 하나 산하 식민지에서는 여전히 현지 화폐가 통용되었고, 심지어 프랑스의 프랑조차도 어느 정도 국내에서 운용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는 일본, 즉 전국 시대 이후 도쿠가와 막부의 권위 아래 통일되었다고 하는 에도 시대 일본도 마찬가지로, 전국 시대의 다이묘에 비해 그 권위와 권력이 대폭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중세 유럽의 봉건 영주들 못지 않은 권한을 지니고 있었던 각 번의 다이묘들은 번 내의 백성들이 타 번으로 유출되지 않도록 각기 다른 통화 제도를 사용했다.
그 덕분에 여행자들이나 순례자들, 혹은 상인들은 각 번을 넘나들때마다 화폐를 교환할 필요성이 있었으며,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환전상이다. 그리고 그 환전상들이 바로 미쓰이, 스미토모 등 전전의 일본 경제를 지탱해 온 이른바 재벌 일족의 루트인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환전업으로 시작한 이들은 점차 고리대금업으로 영역을 넓혀, 마침내는 금융업으로 까지 분야를 넓혀나갔다. 실지로 막말 각 번의 다이묘들에게 있어서 이들 일족의 금전적 지원 없이는 번의 살림을 꾸려나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미야모토 마타오 외 4 저, 정신성 역 (2001). 일본경영사, 한울아카데미아) 막말의 유신 지사들과 정부군의 싸움에 있어서도 이들은 양 쪽에 균형있는 투자를 지속했고, 그 결과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정부의 경제 발전 과정에서 공기업 불하를 비롯한 갖은 특혜를 누리면서 현대까지 이름을 남긴 거대 재벌로 성장하게 된다.
뿐만아니라 메이지, 타이쇼 시대의 일본은, 동시대의 한국과는 대조적으로 서양의 문호를 적극 받아들여 철도를 비롯한 각종 국가 기반 시설, 즉 인프라스트럭쳐를 대대적으로 정비하기 시작한다. 이 배경에는 물론 일본 역사상 최후의 내전인 무진 전쟁 이후 중앙 정부의 시책에 반발하는 불평 호족 세력들과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진 것에 불만을 품은 사무라이 세력을 일소한 덕에 일본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한 점을 빼 놓을 수 없다.
이후 일본은 서양의 군국주의에 뒤지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식민지 확장에 나서 한국을 필두로 하는 아시아 전역에 광범위한 식민지를 확보, 그를 바탕으로 자국의 경제 발전을 가속화 시키게 된다. 특히 이 식민지 정책은 훗날 일본 경제에 있어서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데, 우선 각 식민지에서 벌어들인 경제력을 바탕으로 발전, 축적해 온 이른바 '모노즈쿠리'의 기술이 전후 일본 경제의 복구 및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는데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으며, 또 한가지는 이들 식민지에 대한 전후 배상금을 정치적으로 교묘히 이용하는 것으로 아세안 지역의 국가들과 오히려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 70년대 일본이 대동아공영권 이론을 주장하며 IBRD (International Bank for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 통칭 World Bank) 의 아시아 판인 아시아 경제 발전 기금의 설립을 주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일본이 지닌 경제적 능력 이외에도 이러한 정치적 수완이 뒷받침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시점에서는 미국의 반대로 인해 무산되었지만, 결국에는 훗날 ADB (Asian Development Bank) 의 설립으로 인해 실현되게 된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러한 와중에 발발한 세계 제 1차 대전으로 인해 발생한 특수로 인해 대전경기라고 불릴 정도의 호황을 누리던 일본이었지만, 전후 유럽의 경제가 복구하면서 또다시 유럽제 제품이 아시아 시장으로 몰려들게 되자 이번엔 오히려 만성적인 불황에 빠지게 된다. 이른바 전후 불황이라고 불리는 장기 불황인데, 여기에 관동대지진으로 인한 지진 공황, 재무 대신의 실언으로 인한 뱅크런 (Bank Run) 으로 인해 발생한 쇼와금융공황 등이 겹치면서 결국 일본 정부는 해결책으로 금 해금을 공표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그 당시 전 세계를 뒤흔들었던 대공황과 맞물리면서, 게다가 금의 수출입이 금지되었던 이전의 가치로 해금을 하는 등 여러 가지 정책적 실수로 인해 촉발된 엔고 현상으로 일본의 수출은 격감, 그로인해 국내 경제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어 일부 지역에서는 아동 매매등의 사건 까지 벌어지면서 심각한 사회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이를 계기로 정부에 대한 군부의 불신감이 커져 그를 억누를 필요성이 대두된 데 더불어 국내 경기 회복을 위한 인플레이션 정책의 일환으로 군비 확장 정책을 펼치게 되면서 일본 또한 군국주의의 길을 걷게 된다. (나라이 오사무 (2005), 더 알고 싶은 일본경제 (일본어판) / Exploring the Japanese Economy, 레이타쿠 대학 출판사, 카나모리 히사오 외 2 (2007), 일본 경제 독본 제 17판, 동양경제, 미야모토 마타오 외 4 저, 정신성 역 (2001). 일본경영사, 한울아카데미아)
이후 제 2차 세계 대전에 참가, 미국의 진주만 공습으로 인한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이어진 전시 체제 하에서 일본은 전시 경제 정책, 우리 나라에서는 소위 병참 기지화 전략으로 알려진 정책을 펼쳐 거국일치 태세로 미국과 연합군의 공격에 맞서게 되나, 전 세계의 식민지를 빼앗긴데다 외국으로의 수출이 차단된 상태에서 국내 경제 상황을 무시한 채 군비 증강에만 전력을 투구한 이 정책으로 인해 일본 경제는 크게 퇴보하게 된다. 그리고 히로시마, 나가사키 두 도시에 대한 공습을 끝으로 일본은 전면적 항복, 이후 GHQ의 통치 하에 현재까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평화 헌법 아래 입헌군주제 민주주의 국가로 개편하는 길을 걷게 된다.
전후 일본 경제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것을 들라면, 우선 철저한 고전파 경제학 이론에 근거한 소위 "이상적인 경제 체제" 건설을 위한 실험 대상이 되었다는 점과 더불어 전시 체제 하에서 다양한 군수 물자 개발에 관여했던 기술자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실제 GHQ 체제 하에서 일본은 미국에서조차 이런 저런 사정으로 인해 정책화 되지 못했던 다양한 이론들이 실제 정책화 되어 도입되 닷지 라인 역시 이러한 실례로 들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큰, 그리고 더욱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 바로 전시 체제의 기술자들로, 신칸센, 자동차, 도로, 철도, 해저 케이블 등, 각종 국가 기반 시설의 확립에 필요한 분야 전 범위에 걸쳐 이들 숙련 기술자들의 축적된 노하우가 진가를 발휘했다.
또 한가지는 전후의 피폐한 경제 상황을 들 수 있는데, 이른바 일본 경제 발전의 삼신기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일본식 경영 시스템의 핵, 즉 종신고용제도, 연공서열제도, 기업 내 노동조합 제도가 생겨난 배경이 바로 절대적 빈곤이기 때문이다. 장기간에 걸친 전시 경제 체제와 패전으로 인한 막대한 피해로 인해 피폐해진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절실한 과제는 우선 먹고 사는 것이었고, 거기에 더불어 GHQ의 재벌 축출 정책으로 인해 일거 대부분의 경영진이 재계에서 퇴출당하게 되면서 노동자급, 혹은 부장, 과장급이던 인사들이 일시에 경영진으로 진출하게 되는 등의 제반 조건으로 인해 경영진과 노동자 층의 의사 소통은 당시 어느 국가보다 밀접한 상태였다. 그로 인해 각 기업들은, 우선 기업의 이익 보다는 자신들이 끌어안고 있는 노동자들과 그 가족의 생존에 중점을 두게 되었고, 그로 인해 생겨난 것이 바로 종신고용제도와 그를 뒷받침하기 위한 연공서열제도, 그리고 그 둘을 가능하게 만든 임금 체제이다.
한국도 그렇지만 일본의 임금 제도는 미국과 영국의 이른바 앵글로 색슨식 임금 체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탄력적이다. 즉 고정 임금의 비율이 낮은 대신 기본적으로 몇 개월 분의 봉급과 맞먹는 보너스가 매년 두차례 내지 세차례지급되며, 무엇보다도 각종 수당이 차지하는 비율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높다. 심지에 전후에는 가족 수당 이외에도 육류 수당 등을 비롯하여 가계의 생계를 뒷받침 할 수 있는 각종 수당들이 지급되었을 정도이다. 이렇듯 영미와는 달리 일본에 있어서 기업이란 노동자의 생계 그 자체를 책임져주는 후원자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그로 인해 자연스레 노동자들의 기업에 대한 충성심 역시 강해졌다.
그와 더불어 탄력적인 봉급 체제 덕분에 영미에서는 기본적으로 불가능한 코스트 삭감 정책, 예를 들면 전 사원의 보너스 삭감을 통한 급료 감축이라던가, 더 나아가 전 사원들의 일시적인 급료 삭감 등의 정책을 실시 할 수 있었다.
또한 노동 조합 역시 영미식의 기업 외 조합이 아닌 기업 내 조합으로 발전하게 된 것 역시 근본적으로 이 절대적 빈곤에 의한 것이다. 본디 노동 조합이란 사용자와의 대결이 주 목적이 아닌, 노동자들 간의 상호 구제가 주 목적이었다. 일본의 노동 조합 역시 설립 당초에는 바로 이 목적에 충실하여, 기업 내부의 각 노동자들이 서로를 돕기 위한 목적으로 자발적으로 결성되었다. 그러한 탓에 같은 산업에 속한 노동 조합이라 할지라도 타 기업의 조합들과는 연대감이 낮고, 또 영미의 노동 조합에 비해 기업에 대한 협조성과 충성심이 높은 편이었다.
종합적으로 전후의 절대적 빈곤 덕에 확립된 이 체제는 일본의 경영진에게 큰 재량을 가져다 주게 되었고, 여기에 정부 시책인 안정 주주, 즉 이른바 메인 뱅크 시스템과 통산성의 적극적 지원 및 지도로 인해 소위 JAPAN Inc. 라고 불릴 정도의 거국일치적 경제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 by | 2007/12/03 23:09 | 트랙백(1)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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